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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회현동 한국은행 건너편에 위치한 옷가게 앞에는 '레깅스 3장에 5000원'이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불황을 타개하기 위한 고육책이다. 이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박호석 사장(가명·44)은 "3일 전까지는 레깅스 4장을 1만원에 팔았지만 재고가 많이 쌓여 있어 3장에 5000원으로 가격을 크게 낮췄다"고 말했다.
가격을 낮추자 옷을 구매하는 손님은 늘었지만 매출은 크게 늘지 않았다고 한다. 가장 싼 물건만 찾는 손님들 때문이다. 매장에서 만난 직장인 김현지 씨(26)는 "보통 레깅스 한 장을 6000원에 구입했는데 여기 가격이 엄청 싸서 물건을 샀다"며 "요즘 쇼핑을 할 때는 싼 물건 중에서도 품질과 디자인이 크게 떨어지지 않는 것을 찾는다"고 말했다.
불황의 큰 그늘이 소비 지형도를 바꾸고 있다. 한 푼이라도 저렴한 상품을 찾는 소비자가 늘면서 '가격 파괴' 현상이 가속화되고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비)가 높은 상품으로 승부를 보려는 가게가 늘고 있는 것이다. 스타벅스에 대항하는 1500원짜리 커피, 브랜드를 지우고 대형마트에서 판매되는 PB상품, 5000원짜리 구두와 의류, 생필품을 1000원에 판매하는 다이소 같은 가게들이 대표적인 예다. 일각에서는 이 같은 '저가 열풍'이 디플레이션 전조가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 홈쇼핑 '10만원 이하' 실속형
15일 GS샵, CJ오쇼핑, 현대홈쇼핑, 롯데홈쇼핑, NS홈쇼핑 등 주요 홈쇼핑 채널이 일제히 발표한 '2015년 홈쇼핑 히트상품' 목록만 봐도 소비자들의 불황형 소비는 여실히 드러난다. 10만원 이하로 저렴하면서도 구성이 넉넉한 '세트상품' 위주로 구매가 이뤄졌다. GS샵에서는 판매 상위 10개 품목 중 5개 품목이 10만원 이하 저가 상품이었다.
CJ오쇼핑도 상위 10개 품목 평균 단가가 전년(10만7000원)에 비해 2만원 가까이 뚝 떨어진 8만9000원을 기록했다. 제품별 단가만 살펴봐도 10품목 중 8품목이 10만원 미만이었다. 가장 많이 팔린 상품인 '지오송지오' 여름 티셔츠는 7만9900원에 티셔츠 8종을 구매할 수 있다.
롯데홈쇼핑 1위 판매 품목인 '아지오 스테파니' 카디건은 6만9000원에 3개 1세트, 현대홈쇼핑 1위 상품인 '맥앤로건' 티셔츠는 6종을 6만9900원에 판매하고 있다. NS홈쇼핑 판매 1위 상품인 '오즈페토' 슈즈는 가격이 3만원대에 불과하다.
과거에는 장을 볼 때마다 제조사를 꼼꼼히 따져보던 소비자들도 긴 불황 앞에서는 '가격'을 최우선 순위로 따지는 소비 성향을 보이고 있다. 이마트, 홈플러스, 롯데마트 등 주요 유통업체에 따르면 전체 상품 매출에서 PB 상품이 차지하는 매출은 모두 20%를 웃돈다. 2006년 유통업체들 PB 비중은 7%대에 불과했다.
이마트에서 올해 4월 내놓은 '노브랜드' 시리즈는 아예 브랜드를 없애고 가격과 품질로만 승부하겠다는 대표적인 '불황형' 상품이다. 노브랜드 감자칩은 경쟁 제품 대비 반값으로 시장에 나온 이래 매출이 급성장해 지난 6월 말 출시 이후 한 달 만에 감자칩 1위에 올라섰다.
홈플러스는 전체 PB 매출 비중이 28.4%로 대형마트 중에서 가장 PB 매출 구성이 높다. 홈플러스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우유는 연세우유와 손잡고 내놓은 '홈플러스 좋은상품 1A우유'(1ℓ)로 집계됐다.
◆ 1500원짜리 저가형 커피 뜬다
몇 년 전만 해도 '밥값보다 비싼 커피'를 식후 한잔 마시는 것이 일상 속 소소한 사치로 불렸지만 최근에는 3000원을 넘어가는 커피를 사먹는 사람들이 '바보'가 되는 시대가 됐다. 2000원대 저가 커피를 파는 이디야에 이어 1000원대 아메리카노, 900원 원두커피 등 초저가 커피 전문점들이 뜨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1500원짜리 아메리카노를 판매하는 등 '저가형 커피' 유행을 선도하고 있는 곳은 빽다방이다. 빽다방은 2006년 처음 문을 열었지만 최근 불황이라는 사회적인 바람을 타고 전국에 매장을 300개로 늘리는 등 큰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 생계형 DIY족 늘어
지난 7월 온라인쇼핑몰 11번가에서는 단돈 9만9000원짜리 노트북이 판매되며 인기를 모았다. 이 노트북은 메모리와 SSD 등 노트북 필수 부품을 '일부러' 제거해 개인이 기존에 갖고 있는 구형 PC 부품을 재활용해서 쓸 수 있게 했다.
이처럼 장기 불황이 지속되자 '불황형·생계형' DIY족도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노트북을 직접 조립해 쓸 뿐만 아니라, 스마트폰을 직접 고치고 심지어 자동차 타이어까지 직접 간다. 11번가에 따르면 소형 드라이버, 핀셋, 나사로 구성된 '스마트폰 수리 키트'는 매월 약 50%씩 판매량이 늘며 승승장구 중이다.
최훈학 이마트 마케팅 팀장은 "완제품을 구매하던 과거 소비자들과 달리 최근에는 DIY형 제품을 구매하는 것이 하나의 소비 트렌드로 정착하고 있다"며 "상대적으로 가계 부담을 낮춰주는 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개성도 반영할 수 있어 유통업계는 다양한 영역에서 소비자 참여가 가능한 제품들을 개발해 선보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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