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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세계 속으로 |
사진 : 프랭크 헐리 |
두 남자가 눈보라 속에서 몸을 숙인 채 식수로 쓸 얼음을 캐고 있다. 이 일은 세계 속으로 1911년에서 1914년까지 3년 동안 호주 정부의 지원을 받아 떠난 남극대륙 과학 탐험대의 주요 일과 중 하나였다. |
털이 두꺼워 동상에 잘 걸리지 않는 데다 체력과 지구력을 기른 그린란드 허스키들이 오스트랄라시아 지역의 초기 남극대륙 탐험대의 썰매를 끌고 있다. 탐험을 떠난 38마리 개들 중 두 마리만 살아 돌아왔다. |
1961년, 더글러스 모슨의 남극대륙 탐험 50주년을 기념해 방한모를 쓴 모슨의 얼굴이 나온 5호주달러짜리 기념우표가 발급되었다. |
탐험대의 기상학자인 세실 토머스 매디건이 온통 서리로 뒤덮인 얼굴로 피난처를 찾아 실내로 들어왔다. 풍속이 시속 320km에 달하기도 하고 겨울 기온이 보통 영하 28도 이하로 내려가는 남극대륙의 극한 날씨에서는 고작 한 시간이면 이런 얼음 마스크가 생긴다. |
탐험 중에 태어난 귀여운 블리자드는 힘이 다해 더 이상 썰매를 끌지 못하게 됐을 때 2마리를 제외한 나머지 개들처럼 결국 사살됐다.
썰매 팀원 한명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스노브리지로 덮여 있던 크레바스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더글러스 모슨의 팀은 수없이 많은 크레바스를 건넜는데, 결국 한 크레바스에서 동료 벨그레이브 니니스와 개 6마리, 천막, 대부분의 식량을 비롯한 중요한 장비를 잃었다.
아치볼드 호들리, 시드니 존스, 조지 도버스는 미지의 영역을 지도로 작성하기 위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떠난 8개의 3인조 팀 중 한팀이었다. 전체 대원들 중 두 명만이 남극대륙에 와본 적이 있었으며, 일부는 눈을 본 적조차 없었다. |
얼음 터널이 인공 동굴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였다. 이 동굴은 지은 지 며칠이면 눈으로 뒤덮였다.
2400km 떨어진 주 기지의 가로, 세로 각각 7.2m인 생활 공간에서 남자 18명이 지도를 만들고, 실험을 하며 요리를 했다. 이들은 이곳에서 음반을 틀거나 초콜릿을 건 채 내기를 하기도 하고 모슨이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큰 소리로 읽어주는 것을 들으며 긴장을 풀었다.
여름의 어느 날 한 대원이 강풍이 부는 가운데 천막을 치고 있다. 끊임없이 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천막을 치려면 한 시간 이상이 걸릴 수도 있다. 극심한 추위와 식량 부족 외에도 언제 길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늘 따른다.
동부 해안 탐험 팀의 대원 2명이 썰매를 직접 끌고 가고 있다. 해안의 빙붕이나 극지 고원을 걷는 일은 크레바스와 얼음 덩어리, 풍설로 생긴 눈의 융기부 때문에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팀은 미지의 영역 430여 km를 용케도 탐험했다.
아델리펭귄은 탐험대 대원들뿐만 아니라 썰매개들의 식량원이기도 했다. 펭귄들을 곯려 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대원들은 절벽 근처에 서 있는 펭귄에게 몰래 다가가 녀석들을 밀어 바다에 빠뜨리곤 했다. |
한 대원이 주 기지 막사로부터 1.5km도 안 되는 곳에 있는 데니슨 곶 동쪽 끝의 거대한 얼음 동굴을 탐사하고 있다.
데니슨 곶 근처에 정박해 있던 보급선 오로라 호는 탐험대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생명줄이었다.
비운의 과학 탐험이 끝나고 몇 년 후, 더글러스 모슨 경이 호주 애들레이드에 전시돼 있는 탐험 기념물을 다시 둘러봤다.
탐험 대원들의 장비는 당시 기준으로 최첨단이었지만, 일부 대원들은 좀 더 따뜻해지기 위해 이 방한모처럼 손수 변경한 옷을 착용했다.
모슨은 무게를 줄이기 위해 아이젠을 벗어 던졌다가, 가파르고 딱딱한 얼음을 만나자 즉석에서 임시 아이젠을 만들어 신어야 했다.
모슨은 톱날이 달린 작은 칼로 150km 떨어진 주 기지까지 혼자 끌고갈 수 있도록 썰매를 반으로 잘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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